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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4. 30. 21:20

율곡이이의 업적과 생애 칼럼(Opinion)2014. 4. 30. 21:20

율곡이이의 업적과 생애

이이 1536~1584 조선 시대 중기의 학자, 정치가 자는 숙헌, 호는 율곡, 석담, 우재

생애

이이는 강릉 오죽현에서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4세부터 글방에서 공부했으며, 13세의 어린 나이에 생원과 진사를 뽑는 작은 과거 시험인 소과에 나가 장원 급제를 했다.

 

이때부터 그는 아홉 번의 과거에 나가 모두 장원을 차지했다.
16세 되던 해 어머니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 무덤 곁에 작은 초가집을 짓고 3년 동안

무덤을 지켰다. 이후 금강산에 등러가 유학을 공부하는데 전념했다.
1558년에는 이황과 만나 함께 토론을 하며 공부하기도 했다.


그는 29세가 된 1564년에 호조 좌랑이라는 관직을 받아 벼슬길에 오른 뒤 대제학,

이조 판서 등 높은 벼슬을 두루 거쳤다.
학문을 하는 목적이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닦는 '수기'와 백성을 다스리는 '치인'에 있다고 믿었고, 참다운 학문은 백성을 위해 쓰여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벼슬을 하는 동안 이이는 줄곧 백성들이 마음 편히 잘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애썼다.
그는 나라의 일꾼을 만들어 내는 교육에도 뜻을 두어 김장새아, 조헌, 이귀 등 108명이나 되는 훌륭한 제자들을 길러 냈다.
청주 목사, 황해도 관찰사 등의 관직을 받아 지방을 다스리고 있을 때 황약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백성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또한 사창제도를 실시하여 굶주리는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일에 힘썼다.


이이는 이기론을 주장했는데 이와 기를 각각 무형과 유형으로, 또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이라고 설명했고 사물은 모두 변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인간은 욕심과 하늘의 뜻을 따르려는 2가지 마음을 다 가지고 있는데 도리를 위해서 행동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했다.


바른 말을 잘하며 자신의 뜻을 반드시 실천에 옮겼던 이이는 사회 개혁을 위해 1574년 사회의 7가지 잘못된 점을 바로잡자는 내용을 담은 <만언봉사>를 선조에게 올리기도 했다.
이이는 45세 때에 다시 선조에게 개혁안을 올려 법 제도를 새로 바꿀 것을 주장했다.
또한 정치에서도 동인.서인 간의 갈등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으며, 후대에 자신의 사상을 전하기 위해 <기기살기>, <경연일기>을 완성했다.


이어 북쪽의 여진족이 조선 땅에 쳐들어온 1581년에 병조 판서가 되어 여진족을 무찌르는데도 앞장섰다.


1583년에는 선조에게 10만의 군사를 길러 왜적의 침입에 대비해야 한다는 '10만의 양병설'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이가 돌아가시기 1년전에 주장한 10만양병에는 구체적인 숫자,

즉 수도한양에는 2만명, 조선8도에 각1만경씩 양성하여 주둔시켜야 한다고 명시하였다.
그로부터 9년 뒤 임진왜란이 터져 조선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이가 지은 책으로는 <성학집요>, <격몽요결>, <소학집주>, <동호문답> 등이 있다.

 

 

Posted by 강남포럼 mo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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